날도 쌀쌀한데 갑자기 신륵사가 보고 싶어져서...
신륵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적다...꽤 유명한 사찰인데도 오히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봉미산에 있는 사찰.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근거가 부족하다고...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는데,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데서 유래했다고...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것은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위축되었으나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신륵사는 지어질 당시에는 어떤 자연환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차에서 내려 몇 분만 걸아가면
되는 평지에 있으며 강변에 있다...
다만 입장료가 2200원으로 저렴하지 않은 비용이며, 유독 절들이 입장료가 있다...오래된 성당같은 곳은
돈 받고 입장하는 곳이 없는데 말이다...
1962년 7월29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한강파노라마'라는 칼럼에 여주신륵사 편이 다루어져 있다.
국보 7개가 유물이라는 기사...
[항일의병 일으킨 지구이기도...
남.북한강의 합수점에서 남한강을 따라 양평을 거쳐 여주까지 대략 2백리. 여주이천은 쌀의 고장. 읍에서
상류로 5리, 강을 건너 북안천송리 숲속에 신륵사다.
이 근처에서 벽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에 그리 흔치 않은 중국식 벽돌탑이 있기 때문.
나옹이라면 태고와 함께 여말불교의 최고봉이요 무학의 스승.
여주 세종릉은 예종 원년에 광주에서 옮아왔다. 세조능에 봉선사, 중종능에 봉은사하듯이 세종릉에는
신륵사가 천복의 재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호의 부대가 일군을 무찔렀다는 신륵사전투의 자리는 어디쯤인가하고....
상부고위의 지휘관들이 숨어달아날때 여주, 원주의 향병을 모아 신륵사, 구미포에서 적군에 타격을 주고
그 공으로 여주목사가 된 몇 달후에 김화에서 전사한 사람.
평시에는 정부의 시달림을 받고 급해지자 정부의 버림을 받은 그 민중이었다...
또 각지의 이런 자취들이 좀 더 발견정리될 때 우리의 역사가 생기있게 다시 쓰일 것이다. 여주, 원주는
구한말에도 항일 의병의 활동이 컸던 지구의 하나. 왜란의 의병을 말하면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기사를 보면 옛날 것이 더 재미있다...
신륵사의 각 보물들을 살펴 보면,
조사당은 보물 제 180호.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건물로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지붕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고...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를 지은 분..
1939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이 당시에 신륵사 조사당이 보물 지정이 되었다고 나온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보물 제 225호.
흰 대리석으로 건조되었으며 기단에서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각층이 모두 한장씩의 돌로 구성...
법당 앞에 서있는 이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여러 층의 탑신이 얹혀있는데 현재의 탑신은 7층까지만
남아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보물 제 226호.
벽돌과 화강석으로 축조되었으며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는 벽돌로 되어 있다.
탑 북쪽에 이 탑의 수리비가 있는데 건립연대가 1726년이고 전탑의 초장 연대를 신라시대로 보아왔으나
벽돌의 문양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
우리나라에 몇 기밖에 안 남은 전탑은 신라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안동비장에 많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만들어진 것은 여주에서 보게 되어 희귀하다고...
1974년 7월19일자 경향신문에 보면...
정수라는 칼럼에 신륵사 다층전탑 탑신부에 대해 다루었다.
처마부분 짧아 경쾌한 멋...벽돌에는 연주, 당초문 새겨져.
역사적으로 전탑 건립에 대한 관심은 신라통일 전후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벽돌탑의 유례도
신라통일시대 이후의 것으로 한국 최대 최고의 전탑인 안동신세동 7층전탑을 비롯하여 안동동부동
5층전탑 등이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 228호.
고려말 왕사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로 신라시대의 정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의 범주에서 벗어나
라마탑계에 속하는 특유의 탑.
고려 우왕 5년에 세운 것으로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
보물 제 227호는 뭔가 봤더니 창녕 인양사 조성비라고...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 229호.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
고려 우왕 5년에 세워졌고 비문은 당대 문장가 이색이 짓고 유명 서예가 한수가 글씨를 씀.
대장각기비 보물 제 230호.
원래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과 승 나옹의 문도들이 작업하던
집이었고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가지를 기록한 석비..
동국여지승람에 신륵사의 딴 이름은 보은사 또는 벽사라는 것과 대장각이 있었음을 나타냄.
보존제자 석종앞 석등. 보물 제 231호.
별다른 역사적 백그라운드가 없는 듯...등장인물도 없고 조각에만 이야기를 전개하네...
보존제자 나옹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 있다.
1974년 7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자세한 기사가 나 있다... 역시 '정수'라는 칼럼이고 신륵사 석등 팔각
화사석이라고...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8각형의 화사석과 8개의 창구는 단순한 기름불 아닌 진리의 빛을 속세에
비추는 통로였으며 비천상은 조상들의 신심과 뛰어난 조형감각을 상징...
아랍 건축의 특색인 화창의 곡선, 두꺼운 처마끝등 고려의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신륵사 석등...
읽어 보면 도움이 많이 되는 기사다...
극락보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28호.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에
다시 중창...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
2010년 7월21일자 데일리안 신문에 난 기사에 의하면 '신륵사 극락보전, 천년 만에 해체 복원'이라고...
명장들이 대거 참여해 원형복원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5호.
양식과 사리합의 조성 시기등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초반인 1392년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
사리를 봉안한 사리합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지 밝혀지지는 않음.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을 의미.
원구형 석조부도. 경기도 문호재자료 제 134호.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언덕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 중 원구형 부도...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3호.
고려 후기에 건립되었으며 기록을 볼 때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나옹 혜근을 다비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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