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는 영남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찾는 문학의 중심지였다고...
촉석루 아래 남강 절벽에 40명이 넘는 인물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데.
근대 계몽기 인물사를 알려주는 역사적 문화재라고.
바위 글씨는 내재된 의미를 고려할 때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촉석루는 공민왕 때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일곱번 중수 중건을 했고 6.25 때 소실되어 1960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처음에는 진양성의 남대장 또는 장원루라고 불렀다고...
진주성은 가야,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천험을 지닌 일당백의 요새였다고...
승전에 도취한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풀었다. 논개는 소복단장의 상복 차림으로 축연에 참석...
가등청정의 부장인 모곡촌지조의 옆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다 촉석루 밑 남강변 외딴 바위로 왜장을 유인하여 목을 껴안고 투신... 20세의 나이...
1934년 동아일보 기사는 새롭다. 식민지 시절의 임진왜란도 그저 역사로만 보는 듯...
기사인 즉 '경남 진주읍내 남강 연안에 촉석루가 우뚝 서잇으니 이곳이 임진왜난때 론게가 외장 모리촌육조를 껴안고 투신자살한 곳!
그 밑에는 의랑암이 남아잇고 또 론개의 사당이 옛일을 말하면서 서서 잇다. 촉석루성은 삼한 시대부터 성으로서 고려 선종때 첩을 쌓고 누를 세웟다.'
의기사는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 1740년 창건...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에서 진주의 산수가 영남 제일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찬탄...
진주성은 삼국시대게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 만홍산성, 고려시대에 촉석성으로 불렸다.
고려 말 바다에서 올라오는 도둑떼으 침범에 대비해 지은 토성으로 1379년 진주 목사 김중광에 의해 석성으로 바뀌었다고...
1970년대 후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성 안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25년까지 경남도청이 진주성 안에 있었으며 성내의 영남포정사는 도청이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논개는 장수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감의 부인이었다고...
논개사당은 장수에 세워져있고 1846년 장수현감이 논개의 순절을 기려 세운 비석이 있던 자리...
논개는 진주목의 관기였는데 구전되어 오던 그녀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 경으로 추정...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말로 운주헌은 조선시대 통제사와 병사의 집무실 명칭.
영남포정사는 조선말 경남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으로 망미루라고도 했다고...
진주성 수축 관련 명문은 두 개의 돌인데 1680년 진주성을 개축할 때 작업을 담당한 일부 사람들이 표시한 것.
진주라 천리... 산다는 것은 먹기 위한 끝없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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