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효종대왕릉 재실을 왕릉재실 최초로 보물로 지정.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 양주군 건원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이라 했는데 1763년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영릉으로...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 그러나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효종대왕릉 경내 회양목은 쳔연기념물로 지정...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조에게 항복하던 날 소현세자와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은 인질이 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봉림대군은 청에 볼모로 10년을 잡혀 있는 동안 반드시 청나라에 설욕하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우고...
그래서 청나라 군대를 따라가 전투를 참관하고 전술을 익혔다고.
효종이 즉위했을 때 북벌을 추진했는데 이를 위해 군사력을 보강...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벌였고 무력 충돌이 발생해 조선도 파병...
효종은 소수의 정예부대를 파견.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정예 부대의 단위인 중대 규모를 문제가 없었으나 연대 규모에서는 여전히 전술 능력이 낮았다고 한다.
그래서 10만을 정예군을 육성하려는 계획을 잡았는데 결과적으로는 2~3만이 한계였다고...
군대 운영의 노하우와 국방비가 따라오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10년만에 효종이 사망...
북벌이 시스템적으로도 불가능했던 이유는 북벌 자체가 왕실과 조정의 목적이지 나라 자체의 목적이 되지 못하다 보니 국민들이 의욕을 가지지 못한 것...
효종 때 대동법도 실시하게 된다. 토지 상실을 두려워 한 기득권의 반발이 심했다... 무려 5년의 논쟁이 있었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세종 영릉은 합장릉이지만 효종 영릉은 효종대왕릉과 인선왕후릉을 위아래로 배치한 동원상하릉 양식...
인선왕후는 14세에 봉림대군과 혼인하였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
심양에서 현종을 낳았다. 소현세자는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였지만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
한 달뒤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
인선왕후도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다고 한다.
1659년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
효종은 상평통보를 화폐로 유통시키기도 했다고 하는데...
제주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여 그 무기를 시험하기도 했다...
효종이 급서하자 북벌정책도 소멸...
효종은 인선왕후, 안빈 이씨, 숙의 김씨, 숙원 정씨 등 4명의 부인과 1남7녀가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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