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만큼 성을 많이 쌓았다...
융릉이 있는 지역은 박지성이 다녔던 중학교가 있는 동네...
그러나 1789년 이전까지 수원도호부의 읍치가 있던 역사적 도시...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내는 큰 군사도시였다고...
각종 읍지에 의하면 수원, 화성 사람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래서인지 현대사에 와서도 유명한 주먹이...
융건릉 일대는 수원, 화성, 안산, 평택의 중심지.
서해안을 방어하는 방어영의 군사들이 즐비.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의 휴식처를 위한 포구와 이들을 유혹하는 기생집들도 많았다고...
행정의 중심지로서 관리들과 유생들이 밀집되어 있던 장소...
정조가 1789년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으로 이전하라고 지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영조는 정조를 10세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게 하였다...
왕실의 족보를 수정한 것인데... 효장세자가 법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사도세자가 생물학적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날 그에게 세자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고 세손이었던 정조를 불러 후회한다고 말했다는...
그리고 사도세자는 김상로와 홍인한 등 노론 세력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라는 글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세자가 죽어 묻힌 곳을 원이라고 칭해야 하나 왕자의 무덤에 붙이는 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정조는 국왕이 되어 바로 묘소를 옮기지 못했고 운과 때가 맞을 때까지 기다려서 옮겼다는데 이는 국왕으로서의 힘과 재정의 문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게 된 계기는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
의빈성씨에게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그 후 의빈성씨가 임신 9개월에 죽고, 정조의 의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마저 의문사...
이는 정조시대 3대 미스터리라고...
수원도호부 관아가 있던 화산은 조선 건국 이후 천하명당이라고 소문이 나있던 지역...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원도호부에 보면 관아 앞에 국릉치표라는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이는 왕릉을 세울 자리라는 푯말...
정조는 왕실의 경비를 대폭 축소. 비단옷을 입지 않고 반찬도 줄이고 일상경비를 줄였다고.
정조가 묘소를 옮긴 또다른 이유는 사도세자 자신이 그 자리를 천하명당이라고 생각했다고.
원래는 그 자리가 고산 유선도에 의해 효종의 능자리로 선정이 되었으나 윤선도의 정적인 우암 송시열의 반대로 사용되지 못했다고.
정조는 묘소를 이전한 것에 대해 새로운 개혁의 모습으로도 활용을 한 것. 국왕을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구조를 가진 친위도시가 필요했던 것...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답사를 하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이 된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왕조의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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