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야기/충남

충남 부여 정림사지

호구시절 2014. 2. 18. 11:57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국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고...

 

 

 

백제가 부여로 천도 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림사지...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석탑은 7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

 

 

화강암 149장을 사용해 조립식으로 축조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있는 백제 석탑 2기 가운데 최고로 백제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소중한 자료라고...

 

 

이 탑은 우리나라 고대목조양식의 탑파에서 석탑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7세기 초 최고의 예술품으로 꼽힌다고...

 

 

화강석 벽돌로 쌓아올린 이 탑은 각층의 짜임새나 체감률 등 조형미가 뛰어난 걸작품.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란 이름은 이 일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암기와에서 찍힌 절이름에서 연유...

 

 

사찰은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할 당시 전화속에서 완전히 소실돼 석탑만 남았다고...

 

 

1981년 신문 기사를 보니 가장 오래된 석탑에 대해 나오는데... 종래 학계에서는 탑의 양식으로 미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최고일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림사지 탑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정림사지를 발굴해 사찰양식 유물로 미뤄볼 때 백제의 사비 천도와 거의 동시에 만들었음이 확실시 되고 있기 때문...

 

 

건립연대가 6세기 중엽으로 올라가는데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무왕이 창건을 허락했다는 기록 설화가 있어 7세기 들어 정림사보다 늦게 창건된 것이라고.

 

 

예전에는 평제탑이라고도 불렸다는데 소정방이 새긴 글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1978년 동아일보에는 '백제탑은 당이 세웠다고 국민학교 참고서에 오기' 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교학사가 학습참고서 발행 자율협회의 심사를 받아 발행한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표준전과 '고적을 찾아서'에 정림사지 5층석탑을 해설하는 난에 국보 제 9호 일명 평제탑이라고도 하며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의 공을 기녕하기 위해 세웠다 한다고 되어 있다고...

 

 

백제는 전쟁에서 패망하고 국민은 신라로 편입...

 

 

정림사는 일주일이나 불에 탔다고 하며...

 

 

정림사지는 박물관과 석탑, 석불여래좌상 세가지만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백제의 불교문화와 생활 등을 볼 수 있고...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들어온 탑의 변천사 등을 이해할 수 있고...

 

 

정림사라는 절 이름도 고려 때 지은 것이니... 백제시대에는 이 곳이 절이었는지 뭐였는지...

 

 

당시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목탑 기술을 들여왔다고.

 

 

그러나 나무는 화재 등에 취약해 석탑으로 옮겨가 진보된 기술을 이루었으며 신라와 일본으로 전수도 한다는...

 

 

백제시대의 탑이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게 아쉬운...

 

 

거대한 석불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것이며 형체만 살아있는 어설픈 것...

 

 

정림사는 백제가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오면서 건축한 백제의 대표적 사찰이지만...

 

 

1942년 발굴된 고려 기와가 정림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증거를 보여줘...

 

 

큰 술자리를 벌여 장사를 위로했다. 문무왕과 소정방은 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아들 융은 마루 밑에 앉혀...

 

 

660년 백제 의자왕이 항복 후 문무왕과 소정방이 사비성에서 벌인 승리 잔치 장면...

 

 

의자왕은 처음엔 당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고 한다...

 

 

642년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고 성주와 처자의 머리를 베었는데 성주의 처가 김춘추의 장녀 고타소였다는 것...

 

 

백제에 의해 장녀를 잃고 김춘추는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복수를 했고 그 복수심이 백제의 멸망을 불러왔다...

 

 

왕정을 장악하고 정치를 잘하던 의자왕이 656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고...

 

 

주색에 빠지고 충신을 가두는 등...

 

 

당 고종이 소정방에게 13만 군대를 주어 백제를 치게했고 신라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에게 5만을 주어 백제를 치도록 했다.

 

 

그런 와중에도 충신들의 직언을 무시했고 계백을 보내 황산에 나가 싸우도록 했다...

 

 

계백은 5천의 결사대로 신라의 5만과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 네 번의 진퇴 끝에 전멸...

 

 

660년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 신료 93명. 백성 12000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당 고종은 의자왕을 살려주었는데 며칠 안되어 죽었고 백제 신하들의 곡도 허락을 해 주었고 묘를 만들어 비석도 세우게 했다는...

 

 

고타소의 죽음으로 의자왕과 김춘추의 악연이 맺어져 역사의 엇갈린 두나라의 운명이 보여지다...

 

 

정림사지탑과 흡사하게 생긴 탑이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그러나 왕궁리탑은 백제의 것이 아니라고...

 

 

그래도 다른 절터에 비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어서 덜 외로울 듯 하다.

 

 

잊혀진 것들은 언제나 외로운 법인데...

 

 

이런 힘든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잔인하고.

 

 

끔찍한.

 

 

아픈 역사.

 

 

경험하지 말자...

 

'한국이야기 > 충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 서산 보원사지  (0) 2014.02.22
충남 당진 안국사지  (0) 2014.02.21
충남 아산 봉곡사 3  (0) 2014.01.08
충남 공주 신원사  (0) 2014.01.03
충남 서산 해미읍성 2  (0) 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