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동아일보에는 마한시대 고물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익산군 왕궁면 왕궁리 공동우물을 청질하다가 이상하게 생긴 동라한기와 금부처관 한 개를 발견하고 또 그 동리 류씨의 집 뒤뜰을 수선하다가 녯기와 두장을 파내인 바 기와에는 뎨석사라 색인것이 분명한데 그동리 로인의 말을 들으면...
이 동리는 본래 뎨석면(지금 철자로는 제석면) 궁평리라는 곳으로 지금까지 녯광채를 나타내고 잇는 왕궁탑 부근 일대는 녯적 마한시대의 내궁터로 그 우물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것이라는대 이 고물은 력사자료폼임으로 영구보존하기로 목하 관계당국에서 조사중이라더라 (리리)
오층석탑은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
여러 신문들을 살펴보니 논란이 많다.
왕궁이라는 지명이 왕궁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은 아닐런지...
사비에 이은 백제의 네번째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 사비의 별도라는 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백제가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곳의 백제 유적들은 대부분 무왕과 관련된 것이라고.
무왕이 세운 제적사터가 있고 무왕이 태어났다는 마룡지가 있고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쌍릉이 있다...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지가 있고 무왕이 금을 캤다는 오금산이 있다...
왕이 사비에서 익산으로 행차를 나왔다가 무왕의 어머니를 만나 무왕을 낳았다는 해석인데...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던 이유도 출생지이고 성장지였기 때문이라는...
셰력을 공고히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도의 필요성을 느꼈을 거라는...
정황상으로는 무왕의 천도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여러가지 유력한 설에도 불구하고 역사 기록이 없다.
특히 익산에 남아있는 성곽 등 산성이 10여개에 이른다고...
이는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며 무왕의 꿈의 무대였을 것이라고...
신문을 연도별로 보니 30년 이상 왕궁리 유적에 대한 정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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