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사비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소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낙화암이 있다...
부소산은 100미터 정도의 언덕이다. 그래도 돌아보기에는 힘들었던 곳...이 곳은 항상 의자왕과 삼천궁녀, 낙화암이 대명사이다. 이보다 더 좋은 테마를 가진 역사 유물이 또 없을 듯...
백제는 패망 직전까지 100년 정도 신라를 괴롭히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여 남은게 별로 없다. 땅에도 좀 묻히고...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과연 나쁜왕인가...단지 3천 궁녀를 가진 호색가이기만 한 것이지...
삼국사기에 의자왕과 관련한 부분은 한 줄.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 북부성 30여개를 함락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 승자에겐 로멘스이고 패자에겐 호색한인...
의자왕은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애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충신 성충이 충언하자 옥에 가두고 굶어죽게 한 것이 의자왕의 최대의 실수였다고...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은 궁녀가 아니고 수도가 함락되면서 적군에게 쫓긴 부여의 남은 많은 여자들이 도망쳐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쳐 뛰어내린 바위가 타사암인데 후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으로 변했고 우암 송시열이 낙화암이라고 새긴 글씨가 있다...
부소산은 백제 때 솔뫼라고 불렀다. 소나무가 많아서 그런 것인데 백제 때 소나무는 멸망 때 다 타버리고 지금 있는 것은 일본의 리기다 소나무와 한국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리기다 소나무는 빨리 자라는 점 때문에 심었다는데 이제 대체는 어려운 듯
의자왕은 백제의 31대 왕인데 30대 무왕과 신라에서 온 선화공주 사이의 자식이라는게 정설. 아버지 무왕이 그랬듯이 의자왕도 외가인 신라를 수시로 공격했고 성을 함락했다...그러나 신라의 상징인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신라와 당이 외교관계를 맺는다..
의자왕이 20년동안 뺏은 신라의 성은 100여개. 광개토왕이 접수한 성은 64개. 의자왕의 마지막 5년이 최악으로 치닿게 되는데 왕비의 권력 남용과 충신들의 귀양과 처형으로 악화일로에 서게 된다...
충신들이 없어진 자리에는 간신들이 채워졌고 소정방은 1900척의 배로 13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며 계백으로 하여금 5천의 군사로 신라를 막게 했지만 황산벌에서 10배의 병력에 패했다...
백화정은 육각정자로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1929년 군수가 세웠다고 한다.
1972년 동아일보 기사에 부소산성 이야기가 나온다. 관광코리어의 명암이라는 타이틀인데 경주 못지않게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부여의 경우 서구인 관광객 수용태세는 제로상태...
문화재 보존의 면에서도 부여는 문제투성이. 특히 사적으로 지정된 부소산성은 아예 유원지로 화하여 입장료를 받느라고 철조망을 쳐놓았고 산성 안의 영일루 사자루 등은 관광객들이 술마시며 떠드는 장소가 되어버렸다...고 쓰여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에 있는 바위의 이름인데 일연의 삼국유사에 언급된 기록은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이 임하고 의자왕과 후궁들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부른다...고 했지만 속설의 와전. 의자왕은 당에서 죽었기 때문...
당시 궁궐터로는 3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 고려시대에 이르러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동사강목에는 여러 비빈이라고 표현...
3천이라는 언급은 조선 초 문신 김흔이 낙화암이라는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라고 읊은 것이 최초...이후 1941년 윤승한의 김유신이라는 소설에서 3천궁녀라는 말을 사용했고...결국 근대 이전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없다.
1976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한국의 얼굴이라는 컬럼이 있는데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와 자주 싸워 번번이 이기자 교만해져 태자궁을 화사하게 꾸미는 등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국력을 많이 낭비했다고 나온다...
이틈을 타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이 공략에 나섰고 계백의 결사대 5천이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과 격돌하여 네번이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신라 화랑 관창의 무공으로 거의 전원이 장렬한 전사를 했다고...
의자왕은 태주 효와 함께 북방 웅진성으로 도망하고 연합군은 성을 포위, 차남 태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일부 왕족의 배반으로 성이 함락됨...
후에 항복한 의자왕이 나당군의 승전 축연장에 꿇어 앉아 신라의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잔으로 친 행주의 치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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