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야기/충남

충남 서산 해미읍성

호구시절 2013. 11. 27. 09:02

해미는 1414년 덕산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이설된 뒤 1651년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였다고 한다. 이 성은 1491년에 축성하여 영장을 두고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

 

 

 

조선 초기의 병마절도사영과 읍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데 병마절도사영에는 이순신이 1579년에 훈련원봉사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 표본으로 삼기 위해 성안의 민가와 학교를 철거하고 성벽 보수 등을 하였다고 한다...

 

 

고창읍성과 함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읍성. 해미는 서해안 방어에 중요한 위치. 왜구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성벽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을 막는데 이용했다고 전해지지만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진남문은 정문. 화강석으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되고...

 

 

조선시대에는 해안 근처 고을에는 거의 모두 읍성이 있었고 내륙지방에는 큰 고을에만 있었다. 일제 때 읍성 철거령으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지면서 서해좌영을 두어 군사 1400명을 주군케 했다고... 이순신 장군은 임란이 일어나기 13년 전에 이 곳에서 근무. 휴가갈 때 받은 여비와 양곡도 남으면 반드시 반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저 붉은 글씨는 황명홍치사년신해건이라고 쓰여 있는데 명나라 연호로 조선 성종 1491년에 해당하며 그 해에 해미읍성이 완공되었음을 말해준다고... 522년 전.

 

 

1973년부터 본격화된 복원 사업이 시작. 우체국도 이 안에 있었다고... 옥사 자리에 고목이 한그루 있는데 1866년 병인사옥 때 1천명의 천주교도가 고목에 매달린 채 죽음을 당했다고...

 

 

병인사옥은 병인박해라 하는데 조선 후기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원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

 

 

그러나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 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천주교 박해를 하게 됨. 이로 인해 8천의 무고한 국민을 학살...